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문단 편집) === 정치 활동 === 고등학생 당시 [[페론주의]] 성향의 학생단체에 가맹했지만 정작 우익 성향의 입헌국민당에서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이때가 대학 시절인 1982년. 이때 우파정당에서 일했던 것은 아직 아르헨티나가 [[군사독재]]이기 때문이었던 탓도 있었다. 아르헨티나의 [[민주화]] 이후 [[정의당(아르헨티나)|정의당]](페론당)에 입당했다. 이후로 법원에서 판사로 일하다가. 1985년 [[라울 알폰신]] 정권 당시에 경제부 법무 차장으로 임명되었으며 1989년에 [[카를로스 메넴]]이 대통령이 되고 나서는 라틴아메리카 보험관리협회 회장으로 발령이 났고, 국제보험관리자협회의 창립자 중 한 명이 되었다. 이후로 메르수코르와 라틴아메리카 통합협회의 자문도 맡았고 부에노스 아이레스 은행의 고문으로 재직하는 등 주로 금융업계에 종사하였다. 이때 메넴 대통령 자체가 [[신자유주의]]적인 경제 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치며 아르헨티나의 각종 공기업들을 [[민영화]]시켰던 인물이었고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본인도 민영화의 수혜를 받은 금융업계에 종사하면서 수혜를 입은 인물이었던지라 적어도 당시에는 [[좌파]]라고 볼 이유가 전혀 없었다. 다만 1990년대에 중반에 메넴의 후임으로 거론되면서 차기 대권주자로 거명되던 에두아르도 두알데와 가까워졌고 두알데와 메넴의 관계가 썩 좋지 않았기에 페르난데스 개인적으로 정의당 내에서 메넴의 3선에 반대하는 모임인 칼라파테 그룹[* 이 모임에는 두알데와 도밍고 카발로, [[네스토르 키르치네르]]가 참여했다.]에 직접 참여할 정도로 집권 후반기의 메넴에 대해서는 비판적으로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경기 침체 및 부패 스캔들로 인해 3선 개헌이 무산되고 메넴의 반발을 무마시킨 두알데[* 2002년부터 2003년까지 아르헨티나의 임시 대통령이었다. 왜 이리 임기가 짧냐 하면 전임자 [[페르난도 데 라 루아|데 라 루아]]가 경제 붕괴로 대규모 폭력 시위가 일어나자 군부에 진압해 달랬다가 군부가 거부해서 사임한다. 이때 아르헨티나 경제가 바닥을 찍었기 때문에 2010년대 후반에와서는 과장 좀 해서 아르헨티나 경제를 바닥에서 구원해낸 대통령으로 긍정적으로 평가되는 경향이 있지만 두알데가 대통령이 된 것은 대중의 지지를 얻어서가 아닌 그저 [[어부지리]]격이었던 데다가(데 라 루아가 쫓겨날 때 부통령과 장관들도 다 사퇴해 버리는 바람에 대통령 승계권자가 없어서 의회에서 두알데를 임시 대통령으로 뽑았다.) 임시 대통령 재임 당시에는 실업률은 20%대, 빈곤율은 50%대에 달하는 경제난과 그로 인한 정치 혼란으로 [[급진시민연합]]이든 [[정의당(아르헨티나)|정의당]]이든 간에 혼란에 혼란을 거듭했던지라 두알데는 인기가 없었고 당시 아르헨티나 국민들 사이에서는 조롱의 대상이었다. 두알데 본인도 이를 감안해서 2003년 대선에서 네스토르 키르치네르를 지원했지만 네스토르 키르치네르의 입지가 굳어지자 이에 반발하다가 역으로 축출당하는 형편이 되었다.]의 선거운동을 도왔는데 카를로스 메넴 정권기를 거치면서 정의당이 우경화되었기에 당시 아르헨티나의 정치구도에서 데 라 루아는 좌파성향, 두알데는 우파성향의 후보로 여겨졌다. 또한 2000년 부에노스아이레스 시의원으로 당선되었을 때 그는 중도우파 성향의 공화국행동당 소속이었는데 이 정당은 메넴 정권기 초중반 당시 재무부 장관으로 재직하며 신자유주의 정책을 적극적으로 도입한 인물인 도밍고 카발로가 메넴 말기에 정의당을 탈당한 뒤에 창당한 정당이다. 다만 2000년대 초반 당시에 아르헨티나가 혼란기를 겪을 시기에 그는 공화국행동당을 탈당하고[* 도밍고 카발로가 2001년 아르헨티나의 경제상태가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을 때 재무부 장관직에 다시 올랐는데 예금동결 정책 시행으로 10년 넘게 진행된 민영화와 긴축정책에 지친 국민들의 반발을 사며 데 라 루아 정권을 끝장내고 [[모라토리엄|디폴트 선언]]을 하는 데 공헌(?)했고, 그로 인해서 도밍고 카발로의 정치생명은 끝장났기 때문에 공화국행동당 당원으로 더 이상 있을 이유가 없었기도 했다.] 2003년 아르헨티나 대선 당시에 정의당 좌파인 네스토르 키르치네르를 지원했으며 키르치네르가 그를 총리로 임명했는데 금융업계에 재직하면서 쌓아올린 경력에다가 칼라페테 그룹에 같이 참여하면서 친분 및 신뢰관계를 쌓았던 것이 총리로 등극하는데 큰 요인이 되었다. 네스토르 키르치네르가 당선되고 나서 예상을 깨고 아르헨티나의 경제가 되살아났고 4년 내내 별다른 도전요인 없이[* 심지어 이때 두알데 임시 대통령이나 로베르토 라바냐같은 [[정의당(아르헨티나)|정의당]] 내 유력인사들도 네스트로와 대결했다가 지지율이 높은 네스토르에게 줄줄히 패배하면서 정계주류에서 밀려나거나 듣보잡이 되었다.] 1994년 헌법개정 이후 최장수 총리라는 타이틀을 따냈고, 2007년 대선에서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데 키르치네르|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나서도 총리직에 유임되었지만 이듬해인 2008년에 수출세 인상으로 농축업계가 반발하며 수십 일씩 대치하다가 결국 철회되는 사태가 벌어졌고 이로 인해 크리스티나의 리더십에 의문이 제기되며 크리스티나의 지지율이 20%대까지 폭락하자 개각차원에서 해임되었다. 그 이후로 크리스티나와의 관계가 급속히 멀어져서 2009년 중간선거에서 공천에서 배제되었으며 2011년 대선때도 별수없이 크리스티나를 뽑았다는 인터뷰를 할 정도였다. 당연히 2010년대 전반기에는 크리스티나 안티 인사로 활동했으며 2012년에 승리를 위한 전선을 탈당하고 노동당이라는 정당을 따로 차렸으며 2015년 대선에서 다니엘 시올라가 아닌 세르히오 마사를 지원했다. 그러나 2017년 중간선거에서 승리를 위한 전선이 두 개의 정당으로 분열되며 패배했고, 연방 페론주의당 등 중도파 페론주의자들도 썩 좋은 성적을 올리지 못한 채 부진한 성적을 거두자 정의당 내에서 차기 대선을 염두에 두고 [[단일화]]하려는 움직임이 일었고 이 과정에서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와 다시 협력관계를 맺게 된고, 2019년 대선을 앞두고 대통령직 복귀를 시도하던 크리스티나의 부통령 후보로 내정되었다. 당시 대부분의 대권주자들이 갖고 있는 국회의원 경력도 없다. 물론 관료나 금융업에서 종사한 짬밥이 있기는 하고 총리로서 5년간 재직하면서 아르헨티나의 경제를 안정화시키는 데 공헌했다는 평을 듣기는 하지만 그렇다 해도 아르헨티나 정계를 좌지우지할 정도의 거물급 인사는 절대 아니었고, 크리스티나와 관계가 한 동안 틀어질 당시에도 야당 지지층으로부터 인기를 얻었던 인물도 아니라서 별 다른 대안이 되지 못했다.[* 국회의원 경력은 대통령 되기 전에 일단 능력을 검증하는 데 매우 중요한 요소로 꼽히기도 한다. 물론 국회의원 경력이 없는 사람이 대통령이 못 되는 것은 아니나, 알다시피 흔히 말하는 "여야 간 대립"을 정면으로 맞는 이들이 바로 국회의원이다. 단순 지역구 관리는 둘째치더라도, 여야 간 공방을 직접 오고 받을 줄 알아야, 향후 대통령으로서 성향이 다른 국민들을 대하는 것이 훨씬 수월해지는 것. 때문에 국회의원 경력이 없는 사람은 그가 대통령으로서 적합한 지 검증하기 어렵다.][* 물론 당 내에서도 총선 출마 제의를 받았지만, 본인이 거절했다(...).] 그러나 정의당이 2017년 중간선거에서 사분오열되어 패배한 이후로 차기 대선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단일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당내에서 높아졌고 알베르토와 크리스티나도 차기를 도모해야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다시금 협력관계를 가진 것이었다.[* 이외에도 정의사회당 내에 인물이 없었던 것도 한 몫을 한다. 키르치네르 부부에만 너무 기댄 결과 마땅한 대안을 찾기가 어려워졌고, 2015년에 출마한 다니엘 시올라 전 부통령도 결국 [[마우리시오 마크리]]에게 밀려 낙선했다.--물론 정의당이 시올리를 적극적으로 밀어준 것도 아니기는 하지만 일단은 그냥 넘어가자-- 당연히 크리스티나는 이때 3선 연임이 불가능했고, 본인도 이를 감지했는지 3선 개헌을 시도했지만 무산되었다. 그 후 2019년에는 출마가 가능해졌고, 인물이 영 없었는지 크리스티나가 복귀하는 쪽으로 가닥이 잡힌 것.] 그러나 크리스티나가 부패혐의로 기소되고, 크리스티나가 기본 지지층은 탄탄했지만 확장성이 약해서 오히려 역공을 당할 여지가 컸기에 상대적으로 만만한 알베르토 페르난데스를 대통령 후보로 선임하게 되었다. 결국 알베르토가 대통령 후보가 되었고, 대신에 크리스티나는 부통령 후보로 나서는 쪽으로 가닥이 잡혔다. 당초에는 크리스티나 본인이 직접 나서지 않은 탓에 결선에서 마크리에게 밀려 낙선한다는 여론조사가 있었고, 이후로 물가상승률이 지속적으로 오르며 마크리의 지지율이 떨어졌음에도 결선에서 그리 큰 차이가 나지 않을 것이라는 여론조사 결과도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예비선거에서 47.7%를 득표해 32.1%를 득표한 마크리를 약 15% 차로 앞섰는데, 아르헨티나에서 결선투표의 기준치는 50%가 아닌 45%라는 점에서, 그야말로 기적을 일으킨 것. 이후 지지율이 올라 결선 안 가고 본선에서 과반 득표할 것이라는 여론조사가 속속히 나오고 있으며, 각 기관들도 결선 여론조사는 따로 집계하지 않을 정도. 다만 실제 선거에서는 과반득표까지는 아니고 48%의 득표율을 올려서 예상보다는 다소 부진한 성적을 올리기는 했다. 물론 이것도 여론조사와 비교해서 낮게 나온 것이지 역대 아르헨티나 선거 기준으로 볼 때 낮게 나온 득표율은 아니다. 결국 최종 개표 결과 48.24% 득표를 올리며 결선 투표 없이 당선을 확정지었다.[[https://www.bbc.com/news/world-latin-america-50203727|#]] 임기는 12월 10일부터 시작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